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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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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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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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4,1-12

그 무렵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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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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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 말로 ‘교회’를 가리키는 낱말을 자주 쓸 뿐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라는 규정은 제2성전기 유다교의 한 분파였던 쿰란 공동체의 『공동체 규칙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세네파로 추정되는 이 종말론적 공동체는 구성원의 입회에서 추방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권위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며 본인들이 적법한 차독(대제사장)의 자손이라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들과 꼭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형제의 잘못을 공동체 전체에 알리기에 앞서 형제적 사랑으로 그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여러 차례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17). 이 구절은 ‘너는 이제 그 일에 상관하지 마라. 더 이상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다른 한편 ‘이 일은 예수님만이 다루실 수 있다.’는 겸손한 의미까지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분들의 합이 아닙니다. 교회는 봉건 시대의 권력 구조만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로 세워진 기구도 아닙니다. 교회가 힘주어 외치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은 결국 교회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바탕에 둡니다.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신경 쓰는 것은 시노달리타스도 아니요, 교회에 대한 사랑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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